신평면 청운리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사정(射亭)에 관한 기록이 해석돼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오던 궁금증이 일부 해소 됐다.
청운리 주민들은 가보처럼 보관해 오던 “운방 관덕정 실기”(雲坊 觀德亭 實記) 목판본(가로 95cm, 세로 23 cm)을 대구에 거주하는 양우석씨에게 해석을 의뢰하여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오던 마을 유산에 관한 궁금증을 173년 만에 풀어 낸 것에 대해 늦게나마 다행으로 생각하며 후손들에게도 도리를 다 하게 된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했다.
해석된 자료에 의하면 운방리(청운리) 활터 정자(射亭)가 언제 세워진지 알 수 없으며 을미년(1775년) 홍수로 무너져 정자 건물이 없어진 것을 갑진년(1784년) 봄에 마을 원로들이 의연금을 내어 그 자리에 팔작지붕으로 새로 지었다고 했다.
그러나 기해년(1839년)이 되어 또 홍수로 무너져 이 마을 김광옥, 김상룡과 마을사람 몇 분이 면내의 각 마을에 협조를 구하여 기둥이 썩은 것을 바꾸고 깨진 기와를 새것으로 교체하여 준공했으며 같은 마을 무첨제(無忝齋)에 거주하는 양주찬씨가 그 일을 목판에 쓰고 의연금 출연자 명단을 기록해 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군청에서 청사 수리를 위해 이 정자의 기와를 걷어 가려고 하기에 마을사람들의 힘으로 중수해 놓은 위 판본 기록을 제시하며 헐리게 되는 조치를 면하게 됐다고 했다. 이후 관아의 군수도 이 기록을 보고 “이 정자는 백성들이 설립하여 현재 자리는 짜는 처소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빼앗아 갈 수 없으며 이후로는 이 정자를 영원히 청운리의 관덕정(觀德亭)으로 삼는다”라고 했다.
김광옥과 김상룡이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위 사실을 오래 전수 할 수 있도록 오천필씨에게 의뢰하여 정미년(1847년) 9월 상순에 “운방 관덕정 실기”(雲坊 觀德亭 實記)라는 제목의 글을 음각 목판본으로 남겼다.
거기에는 “이 집을 사정(射亭)이라고 한 것은 이곳에 활터가 있어서이며 활쏘기로 덕을 살핀다는 뜻을 담고 있어 사정이라고 한다”
“비록 활을 잡고 화살을 옆에 차지 않아도 백성들의 기풍을 알 수 있고 백성들의 풍속을 증명 할 수가 있으며 백성들의 덕을 살필 수 가 있다. 지금 군수가 활터와 과녁도 없는 것을 알면서 “觀德”이라고 허용한 것으로도 더욱 군자의 마음 씀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정자 이름을 고쳐 관덕(觀德)이라 지은 뜻에 더욱 힘쓰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평면(면장 유화목)은 관덕정이 노후한 것을 올 초에 말끔히 보수하여 마을 주민들이 편리하게 이용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목판본은 지금까지 청운리 마을에서 보관 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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